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E.H.카



‘사회가 먼저인가, 개인이 먼저인가‘라는 문제는 암탉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와 마찬가지이다. 이 문제를 논리적인 문제로 취급하건, 역사적인 문제로 취급하건 어느 한편의 주장은 어차피 그와 반대되는, 똑같이 일방적인 또 하나의 주장에 반박을 받기 마련이다. 사회와 개인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다. 사회와 개인은 서로 필요한 상호 보완적인 것이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외따로 떨어진 섬이 아니며, 그 자체로 완결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요, 본토의 일부분이 다.”이것은 존던의 유명한 말이다. 이 말 속에는 진리의 일면이 담겨져 있다.

한편 고전적 개인주의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사람들이 함께 모인다 해도 다른 종류의 실체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모여지기’전에도 사람들이 존재했다든가, 어떠한 종류의 실체를 가지고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 가 태어나자마자 세계는 우리에게 작용하기 시작해서 우리들을 단순한 생물적 단위에서 사회적 단위로 바꾸어 놓는다. 역사 시대든 선사 시대든 어느 단계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은 하나의 사회 속에 태어나서 태어나자마자 사회에 의하여 형성된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도 개인적인 상속물이 아니라 자기가 자라나는 집단에서 받은 사회적 획득물이다. 언어와 환경은 다 같이 그의 사상을 결정짓는 데 기여한다. 곧 인간이 받아들이는 최초의 관념도 타인들에게서 받는 것이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것처럼 만일 사회에서 유리된 개인이 있다면 그에게는 말도 없고 정신도 없을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가 지닌 영원한 매력은 사회로부터 독립된 개인을 상상해 보려고 한 점이 있다. 그러나 그 러한 시도는 깨어지고 만다. 로빈슨은 추상적인 개인이 아니라 요크(York)에서 온 영 국이었다. 그는 성서를 갖고 다니고 자기의 종족신(種簇神)에게 기도를 한다.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에는 그의 하인 프라이데이가 등장한다. 그리하여 다시 하나의 새로운 사회가 건설되기 시작한다. 이 문제와 관련된 또하나의 이야기는 토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 나오는 키릴로프의 이야기이다. 그는 자신의 완전한 자유를 입증하기 위하여 자살한다. 자살만이 개인에게 열려진 유일하게 완전한 자유 행위며 그 밖에 모든 행위는 결국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성격을 내포한다.

인류학자들은 보통 원시인이 문명인보다도 훨씬 덜 개인적이며, 보다 철저하게 사회에 의하여 형성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의 기본적인 진리를 말해 준다. 단순한 사회는 복잡하고 발달된 사회보다도 훨씬 더 획일적이다. 이는 단순한 사회에서는 개인의 기술이나 직업의 다양성이 훨씬 적게 요구되고, 그러한 계기도 훨씬 적다는 걸 말한다. 발전된 근대 사회는 불가피하게 개인화를 증대시키며 사회 활동의 구석구석에서 그런 과정이 진행된다. 그러나 이 개인화의 과정이 사회의 힘 및 결합력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그릇된 생각이다. 사회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은 병행하며 서로를 제약한다. 사실 복잡하고 발달한 사회라는 것은 그 속에 살고 있는 각 개인들 사이의 상호 의존 관계가 더 깊어지고 복잡해진 사회를 말한다. 개인 구성원들의 성격과 사상을 형성하는 힘이나 그들간에 어느 정도의 통일성이나 단일성을 형성하는 힘에 있어 근대의 국민 사화가 미개 부족 사회보다도 약하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국민성이 생물학적 차이에 따른다는 낡은 생각은 깨어진 지 오래이다. 그러나 사회라든가 교육이라든가 따위의 국민적 배경의 차이로부터 생기는 국민성의 차이는 부정하기 어렵다. '인간성'이라는 포착하기 어려운 실체는 나라와 시대에 따라 매우 다르므로, 지배적인 사회적 조건이나 관습에 의하여 형성된 하나의 역사적 현상을 인간성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를 들면 미국인, 러시아인, 인도인들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런 차이점 중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개인들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 다시 말하면 사회 구성의 양식에 대해 각각이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때문에 전체로서, 미국⋅러시아⋅인도⋅ 사회의 차이를 연구하는 것이 미국인과 러시아인과 인도인의 차이를 연구하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원시인과 마찬가지로 문명인도 실질적으로 사회에 의하여 형성되며, 이것은 사회가 그들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달걀 없이는 암탉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암탉 없이는 달걀도 있는 수 없다.

이와 같은 자명한 이치는 서구 세계가 지금 간신히 빠져 나온 그 이상하고 예외적인 역사적 시기 때문에 그것이 가리워지지만 않았던들 새삼스럽게 논의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근대의 역사적 신화 중에서도 가장 널리 보급된 것이다. 그 제2부에 '개인의 발달' 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에 나오는 설명에 따를 것 같으면 개인 숭배는 르네상스로부터 시작되었다 한다. 곧 그때까지는 '인종, 민족, 당파, 가족, 단체에 속한 한 구성원으로서의 자각밖에 없었던'인간이 이때에 와서 마침내 '정신적인 개인이 되어 그러한 존재로서의 자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개인 숭배는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의 대두와 결부되었고, 다시 산업 혁명의 시작 및 자유 방임주의와도 관련을 맺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에서 선언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는 개인의 권리였다. 개인주의는 19세기의 위대한 철학인 공리주의의 토대였다. 빅토리아 시대의 특색 있는 자유주의 문헌인 존 몰리의 「타협론」이라는 논문에서는 개인주의와 공리주의를 가리켜 '인간의 행복과 복지를 위한 종교'라 하고 있다. '소박한 개인주의'가 인간의 진보의 토대였다. 이것은 특정한 역사 시기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완전히 타당하고 유효한 분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밝히고 싶은 것은 근대 세계의 발전에 수반되었던 개인화의 증대는 문명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 있기 마련인 통상적인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회 혁명은 새로운 사회 집단을 권력의 자리에 앉혔다. 사회 혁명은 언제나 개인들을 통해서, 그리고 자본주의 초기에는 생산과 분배의 단위가 대부분 각 개인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 질서의 이데올로기는 사회 질서에서 차지하는 개인의 창조적 역할을 크게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 발전에 있어 하나의 특정 단계를 나타내는 사회적 과정이었다. 따라서 그에 따른 개인화의 증대를 사회에 대한 개인의 반역이라든가 사회적 속박으로부터 개인이 해방되었다는 말로서 설명할 수는 없다.

여러 가지 징후가 가리켜 주듯이 이러한 발전과 이데올로기의 중심이었던 서방 세계에서 조차도 이러한 역사 시기는 끝이 났다. 새삼스럽게 여기서 이른바 대중적 민주주의가 대두했다든가, 경제적 생산 및 조직이 개인 위주의 형태로부터 점차로 집단 위주의 형태로 이행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길고 풍요한 시기가 낳아 놓은 이데올로기는 아직도 서구와 영어 사용 국가들에게 지배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우리가 자유와 평등 사이의 긴장이라든가, 개인적 자유와 사회적 정의 사이의 긴장 등을 추상적인 용어로 이야기하다 보면 그러한 싸움이 추상적인 관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잊기 쉽다, 그것은 새인 자체와 사회 자체의 투쟁이 아니다. 사회 속에 있는 개인ㆍ집단 간의 투쟁인 것이다. 각 집단은 자기 편에 유리한 사회 정책은 추진하고 자기에게 불리한 사회 정책은 저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오늘날 개인주의는 더 이상 중심적인 사회 조류가 되지 못한다. 개인주의는 개인과 사회를 그릇되게 대립시키며 한 이해 집단의 슬로건으로 떨어져 버렸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지니는 성격의 불투명함 때문에 세계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서도 하나의 장애물로 되고 있다. 물론 개인을 수단으로 보고 사회나 국가를 목적으로 보는 거꾸로 된 사고 방식에 대한 항의로서 일어나는 개인 숭배에 대해서는 나로선 아무런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개인을 사회의 바깥에 떨어져 서 있는 추상적인 존재로 생각한다면 과거나 현재, 그 어느 것도 참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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