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속의 인간


황 필 호


종교·종교인, 사회·사회인

일부의 사회인들은 종교와 사회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던 사회는 전근대적인 봉건 사회였고, 문화와 문명이 발달된 오늘날에는 사회의 길과 종교의 길이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종교와 사회가 전혀 분리되지 않은 오늘날의 이란의 독재 정권을 바라보라고 주장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부의 종교인들도 종교의 궁극적 목표는 바로 이 사회를 초월한 초인간적 혹은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종교와 사회의 엄격한 분리는 당연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종종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바치라.'는 성격의 구절을 상기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종교적인 원칙과 사회적인 원칙의 관계를 종교인의 삶과 사회인의 삶의 관계와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 원칙적인 면에서, 종교의 진리는 사회를 다스리는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제공할 수 없으며, 그 반대로 사회의 현실도 종교를 명렬할 수 없다. 예를 들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詢는 질투, 증오, 살인보다는 자비, 사랑. 평화를 가르친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주장하고, 불교는 인간뿐만 아니라 미생물에게도 자비심을 가지고 대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과 자비의 원칙은 어디까지나 원칙에 불과한 것이다. 사랑과 자비가 구체적으로 사회에 적용되려면 ― 그리하여 사랑스럽고 자비스러운 사회를 건설하려면 ― 그 원칙을 현실에 적용시킬 수 있는 사회적인 메커니즘, 이데올로기, 정치 체제를 동반해 한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동반하지 않은 사랑과 자비의 메시지는 대답 없는 메아리에 그칠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고, 사회를 존속시키고 그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적인 원칠은 종교의 신앙을 주관할 수 없다. 예를 들어서 어느 사회의 존속을 유지하기 위하여 외국을 침략해야 된다는 원칙이 ― 이것도 원칙이라면 ― 언제나 종교의 우너칙에서 배척되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뜻에서, 종교의 원칙은 사회의 원칙을 초월한다고 말할 수 있다. 종교의 원칙이 언제나 사회의 원칙과 충돌해야 된다는 뜻에서는 아니라, 종교의 원칙은 특정한 개인, 가정, 국가, 민족을 초월한 모든 인류에 대한 메시지라는 뜻에서, 종교의 원칙은 사회의 원칙에 역행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종교의 원칙은 그 종교가 존재하고 있는 사회의 원칙과는 본질적으로 무관하다는 뜻이다. 과거에 존재했던 수많은 종교의 선지자들이 그가 속해 있던 사회의 윤리적 타락을 통렬히 반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원칙적인 면에서 종교와 사회의 관계를 고찰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사회를 직접 살아가는 종교인의 삶의 입장과 종교를 신봉하는 사회인의 삶의 입장에서는 전혀 해당될 수 없는 것이다. 우선 모든 사회인이 종교인은 아니다. 그러나 종교를 신봉하는 사회인은 그가 동시에 사회인이며 종교인이란 사실을 망각할 수 없다. 물론 그가 진실하지 않다면 '일요일의 종교인과 월요일의 사회인'이라는 이중의 인간으로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가지나 자기 정체를 상실한 삶이며, 진정한 거은 사회적인 활동과 종교적인 활동을 전개하는 사람이 두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일이다. 더구나 후기 산업 사회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인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의 로빈슨 크루소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모든 사회인이 종교인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인은 이미 사회인이다. 인간은 종교인이기 이전에 이미 인간이며, 인간이라 함은 바고 사회 속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며, 도구를 만드는 동물이며, 웃는 동물이며, 언어적 동물이며, 이성적 동물이며, 종교적 동물이며, 사회적 동물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측면을 무시한 종교적 인간이라는 개념과 종교적 측면을 무시한 사회적 인간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일면만을 관찰한 것이다.

사회에 대한 아무런 관심이나 의식이 없이 그저 물 흐르는 대로 내맡기듯 살아가는 것이 종교의 삶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정한 종교적 삶이란 현실의 부조리, 부정, 불의를 외면하지 말고 오히려 그 개선책을 제공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면서 반성하는 삶이다.

힌때 우리나라에서 종교인의 사회 참여가 문제로 대두되니 일이 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종교인의 사회 참여'라는 표현 자체가 부당한 것이다. 모든 종교인은 이미 사회인인데, 무슨 새삼스럽게 '참여'가 있을 수 있는가. 사회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종교인은 문자 그대로 모순이다. 그러므로 '종교인의 사회 참여'하는 표현은 '역전 앞'이라는 표현과 다름이 없다.

우리는 이제 종교의 원칙과 사회의 원칙은 질적으로 상이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종교인의 삶은 바로 사회 속의 삶이라는 것을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종교와 사회의 원칙적인 관계는 종교인과 사회인의 삶의 관계와 동일하지 않다.

종교인의 행동 근거

그러면 종교인이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발언을 해야 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종교인은 왜 궁극적 실재와의 고독한 실존의 만남에 머물지 않고 타인과의 교제를 통하여 자신의 진리를 전달하고 포교를 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종교는 '나의 구원'과 더불어 '너의 구원'을 충고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종교는 개인의 마음의 정화부처 시작되는 행위이다. 파스칼이 인간이란 언제나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어 간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종교의 궁극적 목표는 '나'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경지로 전진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우리의 목표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나와 그것'의 관계를 인격적인 만남인 '나와 너'의 관계로 승화시킴으로써 '우리'들의 관계를 지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복음을 전달하라고 말했고, 불교의 보살 정신은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때까지 하화 중생(下化衆生)해야 된다고 가르친다.

종교의 이와 같은 공생 공사의 정신은 종교인의 믿음의 대상인 성자들의 삶에 잘 나타나 있다. 그들은 언제나 혼자만의 해탈에 머물지 않고 이 세상의 모든 인류를 구원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위대함은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죄도 없는 그가 이 죄악의 세상 속으로 들어와서 모든 인류를 위하여 죽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석가의 위대함은 그가 우주의 모든 진리를 보리수 밑에서 깨달았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다시 몽매한 중생의 사바 세계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종교란 일단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세상의 명예, 권력, 부귀를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세상을 외면하는 제 1 차적인 떠남에 머물지 않고, 다시 떠났던 세계로 돌아오는 제 2 차적인 결단을 동반한다. 사회를 초월한 '하늘의 사람'으로 머물지 않고 다시 이 세상을 구원하려는 '땅의 사람'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참된 삶은 안락 의자에 앉아서 훌륭한 길을 걸었던 성자들의 삶을 관념적으로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나간 형극의 길을 스스로 스스로 재현시키는 것이다. 혼자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우물 안 개구리에 머물지 않고 찬 바람이 부는 공동의 세계로 다시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불안정하고 미숙하고 의지가 약한 인간이 과연 예수와 석가가 지났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그것은 인간에 대한 지나친 신뢰나 낙관적인 휴머니즘의 허상이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한 종교의 답변은 확실히 인간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을 닮아서 태어났다고 주장하고, 불교는 모든 인간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고, 천도교는 인간이 바로 하늘 ― 인내천(人乃天) ― 이라고 주장하고, 힌두교는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이 바로 아트만(자아)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제약을 받는 지극히 연얀한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렇게 연약한 인간도 하느님의 형상, 성령의 은혜, 불성, 깨달음, 헌성을 되찾거나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진리와 선을 위하여 평생을 살았던 모든 성자들의 고난의 길을 다시 반복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종교의 공생 공사의 정신을 좀더 자세히 밝히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사회에 대하여 아무런 발언을 하지 않는 종교로 오해를 받고 있는 불교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불교의 사회 인식은 인연 생기(因緣生起)의 약자인 연기(緣起)라는 개념에서 쉽게 찾아볼수 있다. 연기란 모든 것이 타자와 관계에서 생겨나며, 단독자로는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다는 사상이다. 그리하여 불가에서 흔히 말하는 '장에 맞는 돌도 인연의 실마리'라거나 '소매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표현들도, 모든 실재가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 할 수 없고, 모든 실재의 바른 위치는 이러한 관계의 정상화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그리므로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개인에 머물지 않고 타인, 사회, 국가 세계로 확대되어 불국토(佛國土)를 건설하는 데 있는 것이다.

또한 불교의 무아(無我)사상도 일체의 자아를 인정하지 말라는 뜻이라기보다 진자아(眞自我)가 아닌 가아(假我)에 망령되이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무아사상은 사회 의식을 부정하기보다는 아집과 망집에 사로잡힌 인간 관계를 제거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무아 사상은 관계를 갖지 않은 실재는 이 세상에 하나도 있을 수 없다는 연기 사상이, 투쟁을 필요로 하는 사회의 모순을 단순히 무명(無明)의 반영으로 보려는 소극적인 자세를 제거시킴으로써, 사회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사상으로 볼 수 있다.

종교의 목표는 진리이다. 그리고 진리는 선포되어야 한다. 선포되지 않은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종교인이 사회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기여해야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종교인의 행동 기준

우리는 이 글의 첫머리에서 종교의 원칙은 사회의 원칙을 '초월'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초월성이란 양자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종교의 원칙은 사회의 원칙 속에서만 나타날 수 있으며, 사회적 원칙과 전혀 관계가 없는 종교적 원칙이란 있을 수도 없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사회 속에 있는 종교인의 행동 기준은 무엇인가? 도대체 기준이 없는 행위한 맹목적인 주관적 행동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물론 구체적으로 종교인이 어떻게 사회에 대하여 발언을 하고 행동을 해야 되느냐는 문제는 극히 어려운 문제이다. 그 방법은 당시의 상황과 정세에 따라서 다르기 마련이며, 한 가지 방식이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도 없을 것이며, 또한 정당한 동기가 모든 수단을 정당화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인은 사회에 대한 행동을 위한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이 기준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할 수 없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진리라고 믿고 있다.

기독교의 기준은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묵상하고 갈구하고 애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예수가 걸었던 길을 우리가 재현하려고 노력하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걸었던 길을 걷는 삶이 바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삶이며, 그의 길을 외면하는 삶은 반 그리스도의 삶이라는 뜻이다.

예수는 누구인가? 그는 죄인, 가난한 사람, 창녀, 세리의 친구였다. 소외된 사람들, 가지지 못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상속받지 못한 사람들의 친구였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빵을 주고, 눈이 머 사람에게는 광명을 주고, 앉은뱅이에게는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고 죄인에게는 구속의 역사를 보여 준 그리스도였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독교인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은 다 나에게 와서 평안을 얻으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따르려면 너의 재산을 모두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명령을 잊지 않는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본질은 첫째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둘째로는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곧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고 충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까마라 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는 이 세상 속에 존재한다. 교회는 세상의 건물 속에 존재한다. 교회는 이 세상을 인간화시키려는 인간의 노력 속에 존재한다.

구체적인 사회 속의 구원을 주장하는 해방 신학자들이 복음화와 인간화가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불교인의 행동 기준은 '부처님은 자비롭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고통의 존재이다. 태어남, 늙어감, 병, 죽음,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미워하는 사람과 같이 살아야 하는 동업 중생(同業衆生)의 고통에 시달리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렇게 괴로움을 받는 인간도 언젠가는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삼천 세계(三天世界)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부처가 될 수 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인생이 고통이며[苦聖諦], 그 고통에는 원인이 있으며[集聖諦], 그 고통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으며[厡聖諦], 그것을 제거하는 여덟 가지의 방법[道聖諦]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우선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여서 무명(無明)에 가린 삼사라(현실 세계)가 바로 니르바나(이상 세계)라는 것을 깨닫고, 또한 다른 중생에게도 그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뜻이다. 진리를 밖에서 찾지 말고 우리가 속해 있는 바로 여기에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부처의 자비로운 마음은 살생을 피하고 방생(放生)을 찾는 것이다.

 

유교인의 행동 기준은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하지 않은 행위는 곧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며, 인간의 본성을 잃은 사람은 금수와 다름이 없다. 그리하여 유교인은 인간의 본성을 양육시키고 함양하고 성장시키는 사회를 군자적인 이상을 가진 사회라고 주장하고 이와 반대되는 사회는 모든 인간이 사리 사욕에 사로 잡힌 소인의 집단이라고 규탄한다.

맺음말

필자는 지금까지 종교인의 사회 의식이 필요성, 종교인이 철저한 사회 의식을 가져야 되는 이유, 그리고 사회에 대한 종교인의 행동의 기준을 몇 가지 종교에서 예를 들어 설명했다. 끝으로 필자는 종교인의 사회 의식은 인간적인 명령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러므로 마치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없다. 사회를 버리고 수양산으로 들어갔던 백이·숙제도 결국 그 나라에서 자라는 고사리를 먹었던 것이다. 위대하고 포괄적인 실재로서의 사회는 개인이라는 조그만 생명이 존재해 왔고 또한 개인이 죽어 간 다음에도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지배를 받고 사는 인간은 동시에 사회를 개조하여 밝은 미래를 건걸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 세상에 지상 천국을 건설하고 천 년 왕국을 건설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밝은 사회'를 건설하려는 우리들의 노력은 종교인이기 이전에 인간인 우리들의 의무라고 말할 수 있다. 필자가 평소에 종교인이 되기 이전에 철학자가 되기 이전에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은 연기적(緣起的)존재이고 관계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필연적으로 공동 주관적이다.

황필호/ 동국대학교 교수이며, 저서로는 '종교 철학 개론', '철학적 인간, 종교적 인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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