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국 우상의 눈물

희망의 문학

주제(主題)와 변형(變形)

김인환

우연한 기회에 아프리카에서 요즈음 나온 작품들을 읽어 보았는데, 그 작품들의 분위기가 너무 익숙하여 오히려 다소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그 익숙함은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넓게 보아 후진자본사회라는 조건이 우리와 공통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국가건설이 불가능할 정도로 극심한 씨족주의와 군이 주도하는 일당정치도 우리에게 그다지 생소한 것이 아니라는 데에도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계급이 형성되어 있지 않고 계급대립이 부재하는 상태에서 교육의 평등과 경제의 균등을 실현하려는 애프리컨 소시얼리즘 또한 신문이나 방송에서 한두 번 만난 적이 있는 내용이다. 또 대륙 전체가 영어를 쓰는 아프리카와 불어를 쓰는 아프리카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의 표현방법이 서양소설과 비교해서 차이를 드러내지 않는 데에도 일면의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작품을 읽고 나서 친숙함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어찌 아프리카 문학뿐이겠는가?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 언어로 표현된 문학작품을 즐길 수 있다. 천차만별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원인은 내용의 조건에 있다기보다 문학의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문학의 형식은 인간 정신의 보편적 약속이며, 어떠한 자료(資料,hyle)는 이러한 약속을 지키는 한도 내에서만 문학의 내용이 될 수 있다. 메를로 뽕띠는 3인칭의 신체와 1인칭의 신체를 구분하고, 생물학과 생리학의 대상이 될 수 없는 1인칭의 신체가 세계를 지각하는 출발점이 된다고  하였다. 주관성과 객관성은 문학의 유형을 갈래짓는 보편적 기준이다. 시론(試論,수필과 평론)은 작자가 개입하는 1인칭 형식이며, 소설은 작자가 개입하는 3인칭 형식이고 희곡은 작자가 개입하지 않는 3인칭 형식이다. 아프리카 사람이건 인도 사람이건 상상력을 언어로 구체화하는 방식은 이 네 가지 유형 이외에 다른 것이 없다.

요즈음 국문학 연구가들은 민담형태론에 관심을 쏟고 있는 듯하지만, 소설에도 보편적 유형이 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연애소설과 추리소설과 입사소설(入社小說, initiation story)은 세계문학에 널리 타나나는 보편적 서사유형이다. 작중자아와 주변세계의 변증법적 대립 과정이라고 소설을 규정할 수 있다면 연애소설은 남자(자아)와 여자(세계)가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과정이며, 추리소설은 탐정(자아)과 도적(세계)이 추적되고 추적되는 과정이며, 입사소설은 아이(자아)가 어른(세계)에 대하여 희망하고 절망하고 체념하는 과정이다. 헤어지의 계기를 신분·재산·전쟁·모해 등으로 바꾸는 데 따라 연애소설의 다양한 변형이 가능하게 되고, 지하국 대적퇴치설화라는 기본형에서 도적이 추구하는 대상을 돈·여자·지위·복수(살인) 등으로 바꿈으로써 추리소설의 다양한 변형이 가능하게 된다. 사회폭로소설과 전쟁반대소설도 추리소설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추리소설의 극단적인 변형은 도적의 관점을 선택하는 경우이다. 예전에 관례(冠禮)라고 부르던 성인식(成入式,initiation))을 핵심으로 전개되는 입사소설로부터도 일반적 사회규약에 동의하지 않는 아이의 시선을 선택하면, 소외된 사람의 비판적 시선을 형상화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다. 소설을 읽기 전부터 독자는 대립의 전개과정을 예상하고 있다. 이러한 기대가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프리카의 소설이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수용되었을 듯하다.

전상국의 작품 가운데는 추리소설과 입사소설이 대부분이고, 연애소설은 드물지만, 기본형 motif을 중심으로 하여 다양한 변형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 그의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 작품집에 실려 있는 연애소설은 「전야(前夜)」한 편인데, 춘자와 상수의 밝음 속으로 침투하는 세상의 어두움을 드러내는 데 초점이 모아져 있다. 처음 만나는 여자를 극장으로 여관으로 끌고 다니는 석진과 기다리다 만나서 무뚝뚝하고 수줍은 상수가 대조가 된다. 노름장이며 술고래인 아버지와 춘자의 몸을 처음 건드린 원주의 가구점 주인은 춘자를 억압하는 역할을 한다. 춘자는 제대로 식별하지 못하지만 스타킹을 사다 가슴에 넣어주는 지금의 주인 남자나 판타롱 바지와 스웨터와 고장난 시계를 주어 고향에 보내는 주인 여자도 이들과 같은 편에 서있다. 이들이 춘자에게 베푸는 선의를 언제나 5시 6분인 시계가 상징하고 있다. 춘자의 마음은 감사로 차 있으나, 이들은 오직 3850원씩 26개월 동안 불입해야 하는 적금으로 춘자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자기를 수단으로만 대하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목적 자체로 존중하는 춘자의 태도에도 잘못은 있다. 상수의 사랑을 통해서 춘자는 비로소 동지와 적을 분간하고 용감하게 거절할 수 있는 여자가 된다. 동생 진태에게 소개를 받아 편지로만 사귄 상수는 자기의 고향인 목포로 춘자를 데리고 가면서 공장장과 다툰 이야기를 해준다. 힘 있는 사람들은 약아서 정말로 화를 내면 물러선다는 이치를 가르쳐 준다. 상수의 푸멩 안겨 춘자는 석진과 주인들의 모습을 어두운 그림자로 느끼게 된다. 빛이 나타날 때에야 우리는 그림자를 그림자로 알 수 있게 된다.

이 작품집에 실린 전상국의 소설들 가운데 추리소설의 변형에 속하는 것은 「동행(同行)」, 「맥(脈)」,「실반지」,「껍데기 벗기」,「사형(私刑)」 등의 다섯 편이다. 춘천으로부터 구듬치 고개를 넘어 와야리까지 가는 고갯길을 동행하는 두 사람이 두텁게 깔린 눈 위에서 주고 받는 이야기는 아무렇지 않은 내용이라도 모두 고백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폐를 앓으면서도 자기와 함께 고된 길을 동행하는 사람에게 최억구는 띄엄띄엄 자기의 과거를 늘어 놓는다. 둘의 관심은 어쩌다가 춘천에서 살해당한 김득칠이라는 사람에게 모아진다. 아홉 살 때 자기의 눈덩어리를 깨뜨린 득수의 손가락을 물어 뜯고 광에 갇혔던 이야기, 사변 때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며 득수를 죽인 이야기, 세상이 회복되자 도망쳐 다니다가 10년이 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라는 이야기. 억구의 말을 들으면서 동행자는 잡았던 토끼새끼가 불쌍해 잠을 못 이루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춘천에서 득수의 동생 득칠이를 만나 반갑게 술잔을 나누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자, 동행자는 여덟 가치의 담배를 건네 주고 하루에 한 개비씩만 피우라고 지시하고 돌아선다. 범인에 대한 동행자의 동정은 곧 이 나라의 역사에 대한 이해와 사랑으로 통한다. 「맥(脈)」의 진호는 역사의 좀더 깊은 곳으로 침투한다. 아버지가 부역자였고, 어머니가 일본인이라는 것밖에 더 자세한 사정을 아무것도 모르는 진호는 임종에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미사끼라는 이름을 궁금하게 생각한다. 조부모의 면례를 위해 아버지와 동행하여 고향으로 가면서 진호는 자기의 의심을 해명하려고 한다. 사건의 실마리가 소설의 진전에 적절할 만큼 천천히 풀려 나간다. 증조부가 동학에 참여했다가 자작고개에서 죽창에 찔려 돌아간 후에 풍암리의 김씨 문중은 최씨 집안을 동계(洞契)에서 제명하였다. 조부는 김씨네의 마음에 들기 위하여 온갖 수모를 견뎌내었지만, 아버지는 김구장의 딸을 삼밭으로 납치해 강간하고 1년 동안 징역을 살았다. 광복이 되자 김씨 문중을 친일파로 몰고, 사변이 나자 인민위원회 풍암리 위원장을 맡았다가 다시 갇히게 된다. 미사끼라는 일본 사람과 같은 감방에 있었는데, 진호의 어머니는 그와 열여덟 살에 조선으로 도망해 나온 여자였다. 미사끼가 죽은 뒤에 그 여자는 아버지의 뒷바라지를 맡았고, 출옥하여 미장이 일을 하는 아버지의 데모도 노릇을 하며 진호를 낳았다. 마을의 젊은이들이 운구를 거부하여, 노인들만으로 면례절차를 마치고 앉은 아버지는 진호에게 가장 쓰라린 과거를 술회한다. 세상이 회복되어 마을 사람들이 그를 쳐죽이려 하였을 때 김구장의 딸이 그들의 앞에서 자결을 하였다. 아내를 묻은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옛날을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앞에 김구장의 아들들이 나타나 굳게 손을 잡아준다. 대립의 역사가 화해의 역사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대립의 해소를 수반하지 않는다면 귀환 자체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대립과 모순은 형태를 바꾸어 우리 시대에도 존재한다. 「실반지」의 최중배는 부역죄로 몰매를 맞아 죽은 아버지가 싫어서 계부의 성을 따라 행세하고 있다. 회사의 이중장부 작성을 담당하여 장부상의 하자를 맞추려고 아내와 아이들도 돌보지 못하고 사는데, 어느날 갑자기 아내가 칼에 찔려 죽는다. 수사 과정에서 그들 부부의 과거가 하나하나 밝혀진다. 그들이 알았던 여자와 남자들, 그리고 최중배의 비밀이 벗겨진다. 없어진 실반지로 수사가 집중되고, 수사관들의 마음에 의처증으로 인한 범행이라는 심증이 얻어질 때, 초경을 기념하여 어머니에게서 실반지를 받았다고 기록한 아내의 일기가 발견된다. 욕심을 내어 인공에 가담한 아버지와 욕심을 못이겨 이중장부를 만든 최중배가 인간의 평범한 행복에 소홀했다는 점에서 같다고 하는 작품의 주제는 교훈적이다.

「사형(私刑)」의 현세는 애꿎은 누명을 씌워 못살게 구는 마을 사람들의 횡포에 대항하여 담담하게 견뎌낸다. 이 마을은 자유당 말기에 부대를 끼고 그런대로 괜찮은 경기를 누리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특히 재미를 본 것은 급수반이나 수송부 선임하사를 통하여 샛길에서 휘발유를 받아내는 일이다. 제대하고 냇가에 가게를 차린 박상사가 휘발유를 빼내다 군수사기관에 걸렸다. 훈련소에서 같은 내무반에 있던 사람이 사복을 하고 나와 현세와 술을 나누었는데, 그때 현세는 문란한 군대 기강에 대하여 몇 마디 건네 적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박상사가 체포된 이유를 모두 현세에게 돌리었고, 5·16이후에 경기가 없어지자 그러한 혐의까지 현세에게 뒤집어 씌웠다. 온갖 욕설이 비등했고,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사람까지 있었으나 현세는 말없이 참고 견디었다. 그의 어머니도 초혼 시절에 남편이 죽어 동네에서 복상사를 시켰다는 흉을 받았고, 사변 때에는 외국 병정들에게 능욕을 당한 적도 있었다. 박상사가 출옥하는 날  현세는 박상사의 애막골 천수답에 피서리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내가 아무리 피하라고 권유해도 현세는 움직이지 않았다. 막상 찾아온 박상사는 고발한 사람이 달아난 자기 아내였다는 말을 하지만, 현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가해질 위해가 두려워 銳氣沼에 몸을 던진다. 개인들의 사소한 일상의 한가운데에 사변을 개입시켜서 작가가 나타내려고 한 내용은 죽음처럼 힘겹게 내리누르는 역사를 감당해내는 인내의 의미이다. 「껍데기 벗기」는 국민학교의 5학년 학급에서 발생한 도난 사건을 대하는 두 교사의 대조되는 태도 위에서 전개되는 작품이다. 자기 학급에는 훔친 사람이 없고, 있어도 교사로서 그 학생을 잡을 수는 없다고 믿는 현선생도 세 번이나 도난 사건이 나자 마지못해 형사선생이라 불리는 권선생에게 해결을 맡긴다. 권선생은 학생들의 집에 늦을 것이라는 전화를 걸게 하고 학급으로 들어갔다. 10여분의 눈싸움, 간곡한 호소, 그리고는 종이 위에 제 이름을 적고 공표와 가위표를 하게 한다. 눈을 감고 내민 혀 위에 회충약을 한 알씩 올려놓고 10분 이내에 범인이 나타나리라고 다짐해 보기도 하고, 의심스러운 학생의 이름을 무기명으로 적되, 그런 사람이 생각나지 않으면 종이 위에 '모릅니다'라고 적게 해 보기도 한다. 공포 분위기를 한껏 조성했다가 갑자기 긴장을 풀어 놓는 일종의 고문이라고 현선생은 생각한다. 교사가 학생들을 권력의 대상으로 삼는 행위가 타당할 것인가, 또 교사에게 허용된 권력의 한계는 어느 정도인가, 고심하고 있는 현선생에게 형사선생의 능력을 시험하려고 저지른 장난이었다는 전화가 걸려온다. 전상국은 어느 작가보다 더 깊이 새디즘의 본질을 투시하고 있으면서도 새디즘의 몰락을 명확한 신념으로 지니고 있다.

「돼지새끼들의 울음」,「우상의 눈물,「산울림」,「안개의 눈」,「침묵의 눈」,「여름손님」,「수렁 속의 꽃불」 등 일곱 편은 입사소설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돼지새끼들의 울음」은 권위주의적인 교사와 어린 학생들의 대립에 작품의 핵심을 두고 있다. 학생들의 권위의 근거에 대하여 질문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 나아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적절하게 묘사되어 있다. 조그만 틈도 주지 않고 학생들을 공동의 목표로 집중시키는 최달호는 여러 모로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교사이다. 기마전 같은 행사만 하나 열려도 그는 참가가 아니라 승리에 목적이 있음을 강조하고 승리를 위해서 취해야 할 무자비한 수단을 지시해 준다. 사람이면 예의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방학 때면 교장과 이사장에게 감사의 편지를 쓰게 하고, 양호실에 며칠 근무하다 미국으로 유학한 이사장의 딸에게도 문를롤 올리도록 분부한다. 이사장의 회갑연에 다른 반에서는 1만원씩 모았는데, 그것도 곱절을 갹출하라고 강요하며, 학급 총무 정태가 다소 불만스럽게 내용을 전달했다고 트집을 만들어 정학처분을 내리도록 한다. 다른 반보다 30분씩 일찍 나와 자습하고, 아침 테스트 1시간, 정규수업 7시간, 보충수업 2시간, 청소가 끝나면 다시 5분 동안 책상에 엎드려, '어머니를 생각하고' 수학 문제를 하나 푼 다음 한 시간의 자습 시간을 마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오후 시간 활용을 항의한 몇 학생이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12명의 학생에게 이탈을 허용했는데, 최달호 선생이 그들의 과외를 맡아 시험문제를 누설하고, 예비고사의 원서를 써 주는 대가로 10만 원씩을 받았다는 소문이 심심치 않게 돈다. 중점개발지구로 떠들썩한 한강 이남에 만평이 넘는 대지를 가지고 있다든지, 변두리에 서너 채의 저택이 값을 올리고 있다든지, 부인이 학부형과 굴리는 겟돈만 해도 사오천 만원이 넘는다든지 하는 소문도 학생들의 귀에 들린다. 어느날 종례 시간에 학생들은 슬리핑 백으로 최달호 선생의 얼굴을 가리고 그 앞에서 『우리는 돼지새끼가 아니라』는 선언문을 읽는다. 창백하게 땀에 젖어 나타난 선생의 얼굴을 바라보고 학생들은 모두 울음을 터뜨리지만, 그 울음은 본질적으로 자기들이 성인식을 통과해 내었다는 감격의 눈물이이라고 보아야 한다. 잠시만 생각해 보아도 이 학급이 우리 사회의 축도임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이 나라 민중이 성인식을 통과하는 날은 언제가 될 것인가? 「우상의 눈물」은 교사와 학생의 대립이 아니라 학생과 학생의 대립을 통하여 성숙을 이룩하는 과정의 묘사이다. 유급생 기표는 그 지독한 잔인성 때문에 학생들의 우상이 되어 있었다. 잘난 체하는 학생의 허벅지를 담배불로 지져 놓으면 그 학생은 무서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않고, 학교측에서도 그의 앙갚음이 무서워서 제적을 시키지 못했다. 선생이 교내 체육대회를 위해서 마스게임용 추리닝을 사라고 하면서 기표와 또 한 명의 유급생에게는 자기가 사 주었다. 기표는 선생이 나가자마자 그 추리닝을 찢어 쓰레기통에 넣었다. 기표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학급을 잘 운영해 나가던 반장 형우도 시험중에 계획적으로 커닝을 시켜 준 것이 그의 기분을 건드려, 일곱 명의 유급생에게 담뱃불 세례를 받고 두 주일이나 입원하게 되었다. 완강히 입을 다물고 누워 있는 형우에게 여섯 명의 유급생들이 따로따로 미안하다는 뜻을 전했다. 그들로부터 아버지는 폐인이고 누이는 차장을 그만두고 술집에 나가게 되었다는 기표의 사정을 알아낸 형우는 그 사정을 거꾸로 이용하여 기표를 무너뜨릴 계획을 세웠다. 그는 기표를 돕는 일을 학급에 제의하면서 기표의 사정을 감동스럽게 제시하였다.

형우는 기표네 가정 사정을 낱낱이 얘기함으로써 이제까지 우리들에게 신화적 존재로 군림해 온 기표의 허상을 빈곤이라는 그 역겨운 것의 한 자락에 붙들어 맨 다음 벌거벗기려 하는 것 같았다. 기표는 판자집 그 냄새나는 어둑한 방에서 라면 가락을 허겁지겁 건져 먹는 한 마리 동정받아 마땅한 벌레로 변신되어 나타났다.

옷 입은 권력이 벌거벗은 폭력을 누르고 승리하는 과정은 학생들의 입사단계의 한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설화자인 유대만은 좀더 깊은 면을 발견해 낸다. 빈곤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버티어 선 기표의 머리를 꺾어버리는 소 시민의 악랄한 전략에 전율하는 것이다.

「산울림」과 「안개의 눈」은 전후로 이어지는 하나의 이야기이다. 피난민 수용소에서 누이를 잃고, 폐광터로 옮아 온 동우는 정임이 이모라는 소녀를 만났다. 그 여자에게는 많은 민속과 비밀이 있었다. 턱을 괴면 엄마가 죽는다. 까마귀가 정수리 위로 지나가면 목숨을 잃는ㄷ. 숫가재를 잡으면 병신 아이를 낳는다, 등등. 형부가 꿈속에 나타나 피난하라고 말해 주면서 경찰 가족이라고 하지 말라고 다짐해 주었다고도 하고 죽은 형부가 지금 언니의 뱃속에 들어가 애기로 되어 있다고도 했다. 정임이 이모에게는 꿈과 생시가 동일하였다. 때로 동우를 안고 뺨을 부비기도 하고 벗은 등을 찬찬히 씻어 주기도 하는 이 여자에게 의존하면서 동우는 누이 잃은 슬픔을 달랠 수 있었다. 이북으로 넘어간 삼촌을 기다리어 애태우던 할머니가 장질부사로 돌아가고, 동우도 그 병에 걸렸는데, 정임이 이모는 동우에게 이불을 씌우고 거적이 땀으로 젖을 때까지 깔고 앉았다가 갑자기 벗기니 동우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아이를 낳고도 말풀과 골뱅이만 끓여 먹던 정임이 엄마가 장질부사에 걸려 벌거벗은 채 아기를 안고 산 속으로 들어가고, 정임이 이모는 언니를 찾아 온 산을 헤매었다. 그 다음날 동우네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트럭을 몰고 온 세 사람이 아버지와 둘러앉아 중공군의 금니를 빼어 돈을 번 일이랑 군부대에서 압수한 탄피를 빼돌려 부자가 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우는 정임이 엄마가 헤매고 있을 산을 바라보며, 누이와 할머니를 생각하고 『느네가 고향에 가면 난 죽을 지도 모른다』고 하던 정님이 이모를 생각했다. 그 여자를 만나기 전에는 떠날 수 없다는 마음이 차를 몰고 온 사람들에 대한 미움으로 바뀌었다. 이 때 동우는 두 가지 신비를 체험하였다. 두 마리 개가 먼 산을 향해 짖는 소리가 환청(幻聽)으로 들리고 동우가 발을 들자 개들이 비명을 지른다. 정신을 차려보니 두 사람의 운전사가 넘어져 있었다. 차가 움직이자 동우에게 갑자기 변의(便意)가 느껴지고, 입을 열기만 하면 벼락 같은 고함으로 터질 듯한 힘이 뱃속 깊은 데서 뼏쳐 올랐는데, 20m도 채 못가서 트럭의 타이어가 터지고 말았다.

곧 떠날 듯이 부릉부릉 겁주던 트럭이 숨을 죽였다. 잠깐씩 어둠의 한모퉁이를 찢었으나 다시 그 어둠 속의 안개에 밀려 흩어지던 트럭의 헤드라이트 빛마저 눈을 감았다. 나는 안개와 어둠의 그 고요 속에서 강물 흐르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트럭을 옴쭉달싹 못하게 묶어버린 기꺼움으로 하여 몸을 떨었다. 어떤 이적이라도 해 보일 수 있는 자신이 뱃 속 깊은 데서부터 뿌듯이 치밀어 올라 어금니에 씹혔다.

정임이의 엄마와 이모가 산 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내가 낄낄거리며 산으로 들어갔다. 나와서 죽은 아이를 놓고 두 여자가 싸우고 있더라고 차주에게 이야기했다. 『그까짓 미친년들 좀 어떻게 했다구 누가 뭐랠 놈 있대요?』그들이 그 여자를 죽여 버린 듯한 암시가 대화 속에 삽입되어 있다. 동우는 어둠과 안게 속에 산기슭 적당한 위치로 몸을 감추었다.

이야기만으로는 단순한 유년의 체험에 지나지 않는 것 같지만, 그 속에도 정임이 이모가 지닌 무녀의 능력이 동우에게 전이되는 사건이 들어 있다. 이러한 유년의 상처는 그의 정신 깊은 데에 자리잡아 한동우은 어른이 되어서도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사정(射精)의 순간에 정임이 이모를 불렀기 때문에 첫째 아내와 이혼하고, 겨우 잡은 택시가 먼 거리를 핑계대고 그냥 떠날 때 죽으라고 소리치니 사고가 나는 것을 보고 둘째 아내도 달아난다. 신체의 이상이 없이도 그의 바람(願望) 하나 때문에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을 알게 되자 셋째 아내도 도망쳐 버린다. 말하자면 한동우는 성인식의 통과에 실패한 사람이다. 「침묵의 눈」도 정신적 외상이 입사과정을 방해하는 이야기이다. 수리대 호수로 놀러가서 아내만 텐트에 남겨두고, 남편은 산 모퉁이 하나를 돌아선 곳에서 아이 둘을 데리고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아우가 보채어 형이 엄마에게 데려다 주려고 가보니 곰처럼 크고 무서운 사람이 엄마의 입에 수건을 물리고 엄마 위에 엎드려 있었다. 돌아가 아버지에게 알렸더니 가 보고 와서 거짓말을 했다고 말했다. 큰 아이가 거듭 보았다고 하니까 물귀신이 불어 헛것을 본 것이라고 하면서 아버지는 거짓말을 했다고 빌 때까지 물에 밀에 넣었다. 물귀신은 물에서 떼여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엄마는 나쁜 병이 들어 따로 살아야한다며 바깥채로 나갔는데 어느날 그 바깥채에 불이 났고, 잿속에서 끌어낸 엄마의 시체는 철사로 묶여 있었다. 그 뒤로부터 그에게는 그 새끼의 귀신이 모습을 달리해서 예고 없이 나타났다. 그것은 두툼한 입술의 중년 여인이기도 했고, 점잖은 신사이기도 했고, 만원 버스 속의 건달이기도 했다. 그는 느닷없이 그 새끼의 면상을 때리고 그 자리에 쓰러져 간질병저처럼 사지를 뒤틀었다. 정신병원에 입원해서는 의사에게 덤벼들어 이상없다는 진단을 떼어 나오면서 의사가 바로 그 새끼였다고 중얼거렸다. 대학의 사태로 앞당겨진 겨울 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사흘 동안 외박했다가 돌아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한 주일 내내 자다 일어난 그는 대문밖 쓰레기 통속에서 백치를 발견했다. 그 새끼라 부르며 백치를 때리고, 굶기고, 고문하고 하다가 끝내는 석유통을 쏟아 놓고 성냥을 그어대었다. 아버지와 친구에게 편지를 띄워, 자신의 죽음을 예고한 후에 백치만 죽게 하고 달아나려는 계획이었지만 격노한 백치의 두 팔이 그의 하체를 잡아 함께 불길이 되어 타올랐다. 피해자의 심리와 가해자의 심리는 서로 통한다는 심리학의 원리를 예증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폭력에 대하여 무방비 상태로 개방되어 있는 유년기의 상처는 치료의 가능성을 모두 차단해 버린다. 가족이 치료되지 않으면 개인은 치료될 수 없다는 심리학의 원리가 다시 예증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콘센트에 꽂은 전선의 끝을 백치의 몸에 대고 『너 불 질렀지』,『너 사람 죽였지』,『너 간첩이지』라고 하며 고문하는 장면에서 방화와 살인은 이해할 수 있지만, 간첩이라는 말은 왜 나왔을까? 방학이 되기 전에 사흘 동안 그가 가 있었던 곳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낱말이 아닐까? 그렇다고 하면 올바른 나라가 이룩되기 이전에는 올바른 개인은 있을 수 없다는 사회학의 원리까지도 이 작품에서 추출해낼 수 있을 지 모른다.

「여름 손님」은 어려서 제대로 치르지 못한 성인식을 나이 먹어 통과하는 행동의 묘사이다. 시체 염하기, 무덤파기, 대나무 쥐고 회다짐하며 선소리 주기, 읍 유지들 개추렴에 개잡아 삶아 바치기, 잔칫집에 돼지잡고 교잣상 얻어들이기 등의 궂은 일을 맡아 하던 아버지 아래서 크면서 가난 자체가 <그>의 상처로 박혔다. 사변이 났을 때도 아버지는 붉은 완장을 차고 궂은 일만 했다. 국민학교 마당에 읍내 아이들을 모아들이기 위해 두부종 같은 걸  치고 다닌다든가, 비행기 폭격에 죽어 넘어진 사람을 치운다든가… 그래도 석두 아버지가 모시고 온 박 형사를 숨겨준 덕으로, 세상이 회복되어도 몰매를 맞지 않았다. 석두 아버지의 조수격으로 일을 다니면서 의처증이 생기자 견디다 못한 어머니가 강물에 몸을 던졌다. 소설은 동일한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의 대조 위에서 전개된다. 껌팔이·신문배달·행상·가정교사로 전전하며 학교를 마치고 공무원이 된 그는 힘있는 자에겐 무조건 굽히고 아부하며, 득될게 없는 자들은 사정없이 짓밟고, 적당히 사람 가려 만나고 적당히 이용하는 생활에 익숙해 있다. 아들하고 쌓아 세운 토담집을 수재로 잃고 공사장을 떠도는 황석두는 고된 생활 가운데서도 동네의 막힌 하수구를 파헤친다든가, 비 새는 기왓장을 뜯었다가 바로 놓아 준다든가, 방구들 뜯어낸 흙더미를 변두리에 버리고 온다든가, 지하실에 물이나 범벅이 된 연탄을 쳐낸다든가 하는 일을 맡아 한다. 골목 끝 어느 집에 세들어 산다는 젊은 부부의 애기 죽은 걸 직접 광목을 끊어다가 염까지 해가지고 먼  시립공동묘지까지 가 묻어 주고 돌아온 일도 있었다. 이 두 사람을 한 집에 동거시킴으로써 성격의 대조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홍석두와 만나면서 그는 유아기의 상처에 다시 한번 직면하고, 천천히 고향의 흙냄새를 자기 안에서 맡는다. 석두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날 석두의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흠뻑 마시고 나서 그는 비로소 입사의 단계를 넘어설 수 있게 된다. 석두는 수해로 큰 아들을 잃었다. 노조에 관계하여 미움을 받던 석두의 아들은 수해에 공을 세워 인정을 받으려고 기계부속품을 구하러 물에 뛰어들었다가 익사했는데, 공장측에서는 기계부속품을 훔치러 들어갔다가 죽은 것이라고 증인까지 내세워 주장하였다.

나 오늘 새벽에 내 큰애 묻은 델 다녀 왔네. 그놈의 비를 맞았지. 갔더니 사람 맘이란 비슷한가봐. 이웃에 살던 사람 하나가 그 빌 맞구 무덤에 엎드렸네. 저번 비루 애들 셋을 다 잃은 사람인데, 비만 쏟아지면 애들 생각이 나서 뛰어온다는 거여. 부모 마음이란 다 같겠지. 그 자식이 누명을 쓰구 죽었기 때문이여.

그는 생전 처음으로 자기 안에 있는 의존심과 적대감을 극복하고 타인의 불행에 함께 슬퍼할 수 있는 마음의 바탕을 회복한다. 입사의 과정이란 바로 인간을 이해하고 염려하고 존중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수렁 속의 꽃불」은 작품의 공간을 시 경계에서 80Km 떨어져 있는 천수산에 국한시키고 있다. 전철 종점에서 20분이나 더 걸어 들어가야 바라다보이는 장소 안에 사건들을 압축해 넣음으로써, 그러한 공간의 폐쇄성이 작품의 통일성을 선명하게 강화해 준다. 오기와 끝없는 욕망의 불덩어리, 출세를 향한 악착스러운 집념은 공무원의 공통자질이다. 3년 동안의 관리 노릇에 지친 마승기는 조용한 삶을 희망하여, 안평시의 풍치림 보호구역의 관리장으로 자원하였다. 이곳은 도시의 무허가 주택을 철거하고 그 주민들을 이주시켜 놓은 위성촌락인데, 풍광이 수려한 그곳의 산림조경이 주민의 이주로 깨어지자 시에서 보호조치를 취하게 된 것이다. 22개의 교회와 32개의 사찰이 있다. 절과 암자 중에는 대원사와 상원사만 등록이 되어 있고 나머지는 모두 미등록 사찰이다. 절과 교회가 많다는 사실은 빈민들의 정신적 불안을 예증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인생의 낙오자인 빈민들의 정신은 소시민들보다 더 근원적인 의미를 질문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전임자의 안내로 다섯 군대의 초소와 유력한 시의원의 묘역을 돌아보고, 마승기는 수렁처럼 깊은 그곳의 생리를 파악하기 시작한다. 중년의 들병이 아낙네들과 무허가 사찰로부터 돈을 뜯고, 연합도장의 불량배들에게 그 돈의 일부를 뜯기는 것이 관리장의 일이었다. 처첩을 거느린 승려들의 도벌을 묵인했을 뿐 아니라 전임자는 스스로 자연석과 희귀한 나무를 캐어 시의 유력자들에게 바치었다. 진상퇴물림 없다는 격으로 그러한 정성이 인정되어 승진한 것이었다. 기숙이라는 처녀를 건드리고 손점수 노인의 약초밭을 빼앗아 기숙이네 집에 붙인 일도 있었다. 천수산은 조용히 가라앉은 장소가 아니라 서로 약점을 엿보며,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권력의 공간이었다. <풍치림 지구 순찰 구획도><풍치림 내 미등록 사찰 일람표><풍치림 내 무허가 건물 대장><비품대장><풍치림 훼손 대장><산불 단속 일지><퇴폐행락 단속일지><보호구역 내 유실수 및 약초재배 수익지출 내역> 등의 장부를 훑어 보면서 마승기는 시에서 보낸 공문을 생각해 본다. 전임자는 바로 자기가 했던 행동을 열거하고, 그러한 비위 사실에 대하여 엄중히 경고하는 내용의 지시를 풍치림 지구의 관리장들에게 보낸 것이다.

풍속소설의 성격을 짙게 풍기고 있는 듯하지만, 이 작품의 핵심은 마승기의 입사과정에 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고향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 채 어머니에게만 의지하며 자란 그 는 사회생활에서 자기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언제나 타인들에게 압도당해 왔다. 아버지의 일을 어머니에게 질문할 때마다 조심해서 살라는 한 마디의 대답밖에 들을 수 없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그의 아버지의 삶이 비극적이었고, 그 비극의 원인이 역시 사변에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어머니는 간질병 환자였다. 길거리에 풋고추와 마늘을 늘어놓고 앉았다가도 발작이 날 때가 있었다. 몸엣것이 있거나 발작이 나는 밤이면 어머니는 마승기의 몸을 안고 몸부림쳤다. 여자를 안고 있는 꿈을 꾸다 깨어보면 그는 어머니의 품속에 있었다. 그의 성기를 매만지고 있는 어머니를 느끼고 마승기는 그녀를 걷어차며 혀를 깨물곤 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발기할 수 없는 사내가 되었다. 어머니와 자신을 묶고 있는 끈과 줄을 굳게 느끼면 느낄수록 그는 그러한 관계를 미워했다.

내게는 아무런 신앙심도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항상 깨끗한 것, 조용하고 바른 것을 섬기는 사람들에 대한 선망으로 가득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그러한 것을 갖지 못하고 컸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나의 전부였다. 내가 바라는 것을 그네가 전부 지니고 있어야 했다. 그네가 지닌 것은 너무 빈약하고 차라리 저주스러운 것 투성이었다. 나는 가난하고 외로운 길을 걸어왔다. 내 신앙이어야 할 어머니는 한낱 혐오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아버지, 그렇다. 부끄럽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 솔직히 나는 아버지를 바라고 있었다.

마승기가 직장을 구하여 스스로 먹고 살 수 있게 되자 어머니는 자취를 감추었다. 의존심과 적대감과 발기불능은 성인식을 치루지 못한 단계의 특징이다. 자기 외부에 있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내부에 스스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형성해내는 단계가 성숙의 징표일 것이다. 성인이란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고 스스롤 자신에게 명령하는 사람이다. 수렁과 같은 천수산에서 마승기는 입사식을 인도하는 여신을 만난다. 간경화증으로 오래 앓다가 최근에는 합병증이 생겨 목숨이 경각에 있는 남자의 아내였다. 황혼이나 새벽에 산을 헤매고 다니지만 몸을 지키기 위하여 그 여자의 품에는 늘 칼이 들어 있었다. 마승기에게 있어서 그 여자는 불이고 또 얼음이었다.

A. 그 여자를 본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온몸에 화끈한 열기 같은 게 느껴졌다. 믿는 사람들이 혹간 몸에 불을 받는다는 게 이런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둑한 나무 숲에서 얼핏 스쳐 본 그네의 얼굴이나 옷차림은 조금도 분명한 인상을 남기진 못했다.

B. 옆을 스쳐가는 그네에게서 싸아한 한기 같은 게 느껴져 왔다. 흰운동화와 청바지 그리고 검정 스웨터--내가 본 것은 그것뿐이었다. 내가 정신을 가다듬어 뒤돌아보았을 때 안개는 이미 그네의 흔적을 깨끗이 지워버린 뒤였다.

두 번이나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가던 그 여자가 세 번째는 안개를 헤치고 나타난다. 나중에 그 여자의 병든 남편이 죽은 뒤에 일어난 사건임을 알게 되지만, 여하튼 마승기는 이 세 번째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입사의식을 통과할 수 있었다.

내가 그네를 안고 넘어졌을 때 그네는 일체 저항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몸을 굳게 닫은 채 나무등걸처럼 내던져진 그런 무감각한 상태라고 할 수도 없었다. 스스로 몸을 여는 그런 자세는 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서서히 나의 남자를 다스려 가고 있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남자의 뿌리가 이처럼 거센 힘으로 땅속 깊숙이 파고 드는 그 감미로운 작업을, 그 일을 내가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주 정확하고 완만하게 그러나 징을 내리치는 망치의 그 힘찬 동작으로 뿌리를 뻗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나는 뿌리를 향해 땅속 그 깊은 데 숨었던 샘줄이 서서히 터져 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여자가 몸을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나는 더욱 완만하고도 힘찬 동작으로 뿌리를 뻗고 있었다. 신경 마디마디에 기꺼움의 바늘이 꽂혀 경련을 시작했다. 드디어 그네의 목구멍 그 안쪽 깊숙한 데서 신음 같은 게 기쁘게 터져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나는 더욱 당당해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 순간 나는 실로 묘한 환각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였던 것이다. 기억에 없는 아버지에 생생한 실체가 지금 당당한 동작으로 여자의 가쁜 신음 소리를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 자신이 아버지라고 생각한 순간부터 나의 뿌리는 더욱 장대한 힘으로 뻗쳐 샘의 그 깊은 데를 향해 굳건한 줄기를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하고 그네가 내 등을 그러쥐기 시작했을 때 나는 드디어 사정없이 내 몸을 그 불길 속에 던져 넣었다. 어머니가 웃고 있었다.

마승기는 자기의 내부에서 부모와 화합하였다. 근원적 자율성을 회복한 그는 이제 이동 주보의 아낙네들과도 겸허하게 사귈 수 있게 된다. 타인과의 개방적인 관계 속에 투입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한 것이다.

교향곡의 모티프처럼 전상국의 소설들에는 반복되는 화소(話素)가 있다.

1. 민촌에 사는 사람들이 같은 부락의 반촌(班村) 사람들에게 억압을 받는다.

2. 민촌 사람 하나가 거세게 반항하며, 반항의 방법으로 반촌의 여자를 건드린다.

3. 사변 때에 북쪽에 가담하여 온갖 횡포를 자행하다, 세상이 회복되자 매를 맞고 고향을 떠난다.

4. 긴 방랑생활을 청산하고 귀환하여 고향 사람들과 화해한다.

전상국은 반촌과 민촌의 대립을 통하여 권력의 생리를 실감나게 드러낸다. 일종의 마조새디스틱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그의 소설은 정치적 현실의 본질을 폐쇄된 공간에 집약시켜 놓는다. 권력은 에너지처럼 한 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 옮아가며, 권력 자체도 스스로 소멸하고 발생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이다. 권력은 인간의 관계 구조에 깊이 뿌리박고 있으며, 인간의 성격형성에 광범위하게 작용한다. 삶의 공간은 권력의 터가 된다는 관점도 가능한 것이다. 권력을 잡은 사람은 그것을 남용하여 그 극한에까지 가고야 만다. 저항받지 않고 양보하는 권력이란 없다는 것이 전상국의 견해이다. 그렇다면 화해란 불가능한 것일까? 오랜 방황을 거쳐 귀환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전상국은 대립을 통일하고 화해의 장소로 변모한 고향을 보여준다. 화해를 이룩할 수 있는 바탕은 어머니인 대지에 대한 믿음이다. 전상국의 작품에서 산의 모습은 언제나 여자의 나체로 묘사되고 있으며, 대립과 모순을 가려 주는 안개가 자주 등장한다.

A. 안개 자욱하게 핀 골짜기였다. 그 안개는 햇빛과 바람에 쫓겨 더 깊은 데로 서물서물 숨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초가을 조금은 칙칙해 보이기 시작한 산빛이 안데 비쳐 간 자리에 선명했다.

--「안개의 눈」

 

B 그 좋은 계곡에서 피어오른 안개는 서슴서슴 전나무 숲의 바닥을 기어 산비탈 활엽수들의 그 싱그러운 잎 사이로 흩어져 산 전체를 몽롱한 상태에 빠뜨리고 있었다. 안개 속의 새벽 산새 울음 소리는 유별나게 쩡쩡 울렸다.

전상국의 작품에 나타난 귀환의 의미는 매우 복잡하다.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이 곧 다시 찾아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과거로 가는 길이 미래를 위한 투쟁이 된다는 것이다. 흩어지고 풀어져 있는 우리의 삶에서 느슨한 곁가지를 모두 쳐내고 삶의 바닥에 흐르는 리얼한 것들을 찾아 나아가려는 노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사물들의 관계처럼 타락해 잇는 사회에 순응하지 않고 현실의 밑바닥에 살아 있는 창조적 활동성을 확인하려는 전상국의 시도는 사회의 모순을 넘어서 자연의 질서로 육박해 들어간다. 단편화되고 지리멸렬한 생활 안에서 일어나는 거절은 흔히 편협하고 왜소한 부정이 되기 쉽다. 위대한 거절이 못될 바에야 차라리 저 태고 이래의 우주적 질서를 긍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낫다고 전상국은 생각하는 듯하다. 엘리어트는 어디선가 『사물들이 있는 그대로임을 기뻐한다』고 하였지만, 이 말이 궁핍과 질병과 전쟁을 수락한다는 의미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선문(禪門)의 괴걸(怪傑)들은 억압과 착취의 한 복판에서 그 모든 어두움을 휩싸고 넘어서는 큰 긍정을 획득하였고, 성 프란체스코의 경우에도 어둠과 밝음의 변증법은 삶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 우리들의 현실주의는 아직 저 중세의 정신이 획득한 높이에 도달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인간은 그 본질에 있어서 시인으로 대지와 하늘을 날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번쇄한 관념을 털어버리고 자연으로, 문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먹고 자고 일하는 나날의 삶 자체가 상상력의 불꽃으로 응결되는 때가 와야 해방된 개인들의 자유로운 결사(結社)도 이룩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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